일찍이 일석 이희승(李熙昇)은 “시조 하면 가람을 연상하게 되고, 가람 하면 시조가 앞서게 된다”라고 하였고, 노산 이은상(李殷相)은 가람을 십장생 중 물로 비유하여 ‘수송(水頌)’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샘 솟아 흐르는 물 여흘여흘 노래하고
괴어서 호수 되면 달과 별이 잠겨 놀고
한 바다 이루고 나면 호호탕탕(浩浩蕩蕩)하니라
앞에서 스승 가람을 ‘난초의 시인’으로서보다도 바로 ‘가람은 난이요, 난은 곧 가람’으로 우러르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이 말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다시 스승의 난초 시 몇 편을 옮겨 본다.
이는 8·15 후의 작에 속한다. 전항에서 인용한 <난초 4>는 일제강점기 하의 작품이다.
난을 난을 캐어다 심어도 두고
좀먹은 고서를 한 옆에 쌓아도 두고
만발(滿發)한 야매(野梅)와 함께 팔구년(八九年)을 맞았다
다만 빵으로 사는 이도 있고
영예 또는 신앙으로 사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을 이러하게 살고 있다
<난(蘭)과 매(梅)>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 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
청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꽃은 하이하고도 여린 자연(紫煙) 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品)이며 그 향(香)을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 매화梅花 >
외로 더져 두어 미미히 숨을 지고
따뜻한 봄날 돌아오기 기다리고
음음한 눈얼음 속에 잠을 자던 그 梅花
손에 이아치고 바람으로 시달리다
곧고 급한 성결 그 애를 못 삭이고
맺었던 봉오리 하나 피도 못한 그 梅花
다가 오는 추위 천지를 다 얼려도
찾아드는 볕은 방으로 하나 차다
어느 뉘(世) 다시 보오리 자취 잃은 그 梅花
<매. 수선. 난 梅. 水仙. 蘭>
零下 十五度의 大寒도 다 지내고
잦았던 눈도 어제부터 다 녹이고
뜰앞의 梅花 봉오리도 볼록볼록 하고나
한잠 자고 나면 꿈만 시설스러웠다.
이 늙은 몸에도 이게 벌써 봄 아닌가
일깨어 손주와 함께 뛰고 놀고 하였다
한 盆 水仙은 농주를 지고 있고
여러 蘭과 蕙는 잎새만 퍼런데
호올로 병을 기울 菊花酒를 마셨다
<도림난 道林蘭>
蘭의 만여 種이 온 대륙에 펼쳐 있다
계손(溪蓀) 맥문동(麥門冬)도 蘭이라 일컷는데
봄에 핀 이 일경일화(一莖 一花)가 정말 蘭이었다
하이얀 줄거리에 비취옥(翡翠玉) 같은 그 花冠
오늘 새벽에야 바야흐로 벌었다
으늑히 떠 이는 香에 나는 자못 놀랬다
<별>
바람이 소슬하여 뜰 앞에 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시름>
그대로 괴로운 숨 지고 이어 가랴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끔 불어온다.
실낱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든다
친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하노라
<계곡>
맑은 시내 따라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드는 볕을 받아
가는 잎 은바늘처럼 어지러이 반짝인다
靑기와 두어 장을 法堂에 이어두고
앞 뒤 비인 뜰엔 새도 날아 아니 오고
흠으로 내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헝기고 또 헝기어 알알이 닦인 모래
고운 玉과 같이 갈리고 갈린 바위
그려도 더러일까봐 물이 씻어 흐른다
瀑布소리 듣다 귀를 막아도 보다
돌을 베개삼아 모래에 누워도 보고
한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虛空 바라본다
바위 바위 위로 바위를 업고 안고
또는 넓다 좁다 이리저리 도는 골을
시름도 피로도 모르고 물을 밟아 오른다
얼마나 험하다 하리 오르면 오르는 이길
물소리 끊어지고 흰구름 일어나고
우러러 보이던 봉우리 발 아래로 놓인다.
< 대성암大聖庵 >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만은
풀섶 바위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끝에 부딪치고
城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뫼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깊은 바위굴에 솟아나는 맑은 샘물
위로 뚫린 구멍 내려오던 공양미(供養米)를
이제도 의상(義湘)을 더불어 신라시절(新羅時節) 말한다
별이 쨍쨍하고 하늘도 말갛더니
설레는 바람 끝에 구름은 서둘대고
거뭇한 먼산 머리에 비가 몰아 들은다
< 낙엽落葉 >
담머리 굴참나무 그늘도 짙을러니
높은 가지 끝에 한두잎 달려 있고
소소리바람이 치는 벌써 가을이구려
지는 잎 너도 어이 갈 바를 모르고서
바람에 흩날리어 이리저리 헤메느냐
그러나 발에 밟히어 흙이 되고 마느냐
날이 드던 잎이 뜰 앞에 가득하다
바람이 자고 달은 고히 비쳐들고
밤마다 서리는 내려 하얗게도 덮는다
< 봄 >
봄날 궁궐(宮闕) 안은 고요도 고요하다
어원(御苑) 넓은 언덕 버들은 푸르르고
소복(素服)한 宮人은 홀로 하염없이 거닐어라
썩은 고목 아래 전각(殿閣)은 비어있고
파란 못물 우에 비오리 한 자웅(雌雄)이
온 종일 서러 따르며 한가로이 떠돈다
< 창窓 >
우리 방으로는 窓으로 눈을 삼았다
종이 한 장으로 宇宙를 가렸지만
永遠히 太陽과 함께 밝을 대로 밝는다
너의 앞에서는 술 먹기도 두렵다
너의 앞에서는 참선(參禪)키도 어렵다
진귀(珍貴)한 古書를 펴어 서권기(書卷氣) 기를까
나의 추(醜)와 美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나의 苦와 樂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그러나 나의 임종(臨終)도 네 앞에서 하려 한다
<한강을 지나며>
어머님 가시던 날이 오늘밤 같았으면
저 좋은 달 아래서 이 강을 건너시련만
그 밤은 모진 물결에 등불조차 없었어라.
< 홍원저조洪原低調 >
어둑 새벽부터 빤히 트이는 하늘
가로 푸른 線은 담록(淡綠)과 연분홍빛
내 매양 자고 일어나 거울삼아 보노니
몹시 기다리다 아이들 편지 보니
팔순(八旬)된 아버지 주야로 염려하시니
차디찬 방에 겨오셔 이 겨울을 나신다고
바다를 앞에 두고 보랴 보든 못하여도
전진(前津)과 송도(松島)의 그 모양 그 이름과
아울러 파도波濤 소리는 귀에 이미 젖었다
졸다 깨어보니 산뜻한 별이 난다
한나절 오던 눈이 지붕마다 소복하고
흐리던 구름 걷히며 파란 하늘 돋는다
뜰에 나던 볕이 창으로 다시 든다
하루를 보내기 한해도곤 더디더니
어느덧 제 돌을 이어 가을이 되었다
< 냉이꽃 >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詩도 읊고 싶구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나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太陽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水素彈 原子彈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武夷山中(무이산중) 謝枋得(사방득)
十年無夢得還家(십년무몽득환가)
獨立靑峰野水涯(독립청봉야수애)
天地寂寥山雨歇(천지적료산우헐)
幾生修得到梅花(기생수득도매화)
십년을 꿈 속에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푸른 봉우리와 들판의 물가에 홀로 서 있네.
산에는 비 그치고 천지는 적막하기만 한데,
몇 생애나 수양해야 매화의 경지에 이를까?
冬雪梅花
梅花雪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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